문학/영상시

"나는 말을 잃어버렸다"

충암 이영길 2017. 5. 1. 19:19

[정끝벌의 시 읽기] 一笑一老- "나는 말을 잃어버렸다"
'조선일보-2017.5.1(월)A30면'에서 펌
    [정끝벌의 시 읽기一笑一老

 
  "나는 말을 잃어버렸다"- 

내 나이 일흔둘에 반은 빈집뿐인 
산마을을 지날 때 늙은 중님, 하고 
부르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더니 
예닐곱 아이가 감자 한 알 쥐여주고 
꾸벅, 절을 하고 돌아갔다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 산마을을 벗어나서 
내가 왜 이렇게 오래 사나 했더니 
그 아이에게 감자 한 알 받을 일이 
남아서였다
오늘은 그 생각 속으로 무작정 걷고 있다

:조오현(1932~)('적멸을 위하여', 문학사상사,2012)


왜 사느냐고 묻거든, 그냥 웃겠단다. 
못다 한 사랑 때문에, 
죽지 못해 아니 살아 있으니 
산다고도 한다. 
시 속의 '늙은 중님'께서는 
감자 한 알 받기 위해 사신단다.
예닐곱 아이가 일흔둘의 
'늙은 중님'을 불러 
감자 한 알을 쥐여주고는 꾸벅 절한다. 
제 먹을 거 움켜쥐기에 다급할 
예닐곱 나이에, 
빈집 태반인 산마을이니 제 먹을 것도 
부족할 텐데 지나가는 탁발승에게 
감자 한 알을 건네는 아이. 
그 예닐곱 아이가 
보시와 공덕을, 자비와 측은지심을, 
인연과 업을 알았을 것인가. 
아이는 그 자체로 보살이고 부처다. 
그러니 '늙은 중님'에게는 
감자 한 알의 '한 소식'이었을것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랬거니, 
그런 '한 소식' 앞에서 
무슨 말을 앞세울 것인가, 
잃을 수밖에. 감자 한 알의 '한 소식'을 
한 번 더 받기 위해 
일흔둘을 넘기고도 오늘도 
무작정 걸음이랸다? 
                 -시인. 이화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