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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당대 서예4가

충암 이영길 2008. 7. 24. 22:06

(1)유공권 (柳公權 778∼865)

중국 당(唐)나라 서예가. 자는 성현(誠懸). 경조화원현(京兆華原縣;지금의 陝西省) 출신. 806∼820년에 진사에 급제한 뒤 목종(穆宗)으로부터 필적을 인정받아 한림시서학사(翰林侍書學士)가 되었으며, 이어서 경종(敬宗)과 문종(文宗)을 섬겼다. 말년에는 태자태보(太子太保)에까지 이르렀으며 88세에 죽었다. 서예는 처음에 왕희지(王羲之)를 공부했으나 다시 구양순(歐陽詢)과 우세남(虞世南)을 공부하여 일가를 이루었으며, 중년 이후에는 안진경(顔眞卿)의 서풍을 점차 닮아갔다. 자주 <안류(顔柳)>라고 불리었는데, 안진경보다도 단정한 독특한 서체로 당시에 이미 이름을 날렸으며, 지금도 중국에서는 초학의 본으로 자주 이용된다. 목종으로부터 필법에 대한 질문을 받고, <용필(用筆)은 마음에 달려 있고 마음이 바르면 붓도 바르다>고 답한 <필간지언(筆諫之言)>이 널리 알려져 있다. 《현비탑비(玄秘塔碑)》 《신책군기성덕비(神策軍紀聖德碑)》 《금강반야경(金剛般經)》 등이 있다

 

(2)조맹부 (趙孟頫 1254∼1322)

중국 원(元)나라 관리·서예가·화가. 우싱[吳興(오흥);浙江省(절강성) 湖州(호주)] 출신. 자는 자앙(子昻), 호는 송설도인(松雪道人). 조오흥(趙吳興)·조영록(趙榮祿)·조문민(趙文敏)이라고도 한다. 송(宋)나라 황족 출신이지만 원나라 쿠빌라이(世祖)의 부름을 받고, 이후 다섯 황제를 섬겼다. 특히 인종(仁宗)의 총애를 받고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영록대부(榮祿大夫)가 되었다. 서화시문(書畵詩文)에 출중한 원나라 제일의 문인으로, 그림은 산수(山水)·화조(花鳥)·죽석(竹石)·인마(人馬) 등을 모두 잘 그렸으며, 청록산수(靑綠山水)를 그려 당(唐)나라와 북송화풍을 본뜬 복고주의(復古主義)를 주장, 실천하는 등 원나라 산수화의 지도적 역할을 했다. 서(書)는 왕희지(王羲之)의 전형으로 복귀할 것을 주장하였고 진행초전(眞行草篆)의 각 서체에 모두 뛰어났으며, 그 서풍은 중국을 비롯하여 한국과 일본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그림에 《작화추색도권(鵲華秋色圖卷)》 《강촌어락도(江村漁樂圖)》, 서예작품에 《난정첩십삼발(蘭亭帖十三跋)》 《여중봉명본척독(與中峰明本尺牘)》 등이 있고, 문집에 《송설재문집(松雪齋文集)》이 있다. 가문에는 그림에 능한 사람이 많았으며, 아내인 관도승(管道昇)은 묵죽(墨竹)의 명인이었다.

 

(3) 안진경 (顔眞卿 709∼785)

중국 당(唐)나라 정치가·서예가. 자는 청신(淸臣). 산시성[陝西省(섬서성)] 장안(長安) 출생.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백부와 형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으며,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고 박학하여 문장에 뛰어났다. 734년 26세에 진사에 합격했고 뒤에 형부상서(刑部尙書)·이부상서(吏部尙書)·예의사(禮儀使) 등의 고위직에 올랐다. 현종(玄宗) 때인 755년 안녹산(安祿山)의 난 때에는 평원태수(平原太守)로서 의병을 일으켜 당나라를 위하여 싸웠다. 그 후 노군개국공(魯郡開國公)에 봉해졌고 태자태사(太子太師)가 되었으나 본래부터 성격이 강직한 구파(舊派)인 그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항상 경원당하였다. 후에 이희열(李希烈)이 모반했을 때, 죽음을 각오하고 찾아갔다가 붙잡혀 3년 동안 억류된 후 채주(蔡州;河南省) 용흥사(龍興寺)에서 살해당했다. 서예는 초서(草書)에 뛰어난 장욱(張旭)으로부터 필법을 배웠다고 하는데, 해서(楷書)·행서(行書)·초서 각 체에 여러 가지 서풍(書風)을 창시했다. 우세남(虞世南)·구양순(歐陽詢)·저수량(楮遂良) 등과 함께 <당사대가(唐四大家)>로 불리며 당나라 초기에 성행했던 우아한 왕희지풍(王羲之風)과는 전혀 다른 강렬한 서풍을 보여준다. 주요 작품에는 다보탑비(多寶塔碑)·제질문고(祭姪文稿)·마고선단기(麻姑仙壇記)·쟁좌위고(爭坐位稿)·안씨가묘비(顔氏家廟碑) 등이 있고, 저서에 《안로공문집(顔魯公文集)》이 있다.
 
(4)구양순 (歐陽詢 557∼641)
중국 당나라 서예가. 자는 신본(信本). 담주(潭州) 임상(臨湘;湖南省) 출생. 수(隋)의 양제(煬帝)를 섬겨 태상박사(太常博士)가 되었고, 당의 고조(高祖)가 즉위하자 급사중(給事中)으로 발탁되었다. 624년 칙령을 받들어 《예문유취(藝文類聚)》 100권을 수찬하였다. 태종(太宗) 때에 태자솔경령(太子率更令)이 되었고, 홍문관(弘文館) 학사를 겸했으며, 발해남(渤海男)으로 봉함을 받고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를 수여받았다. 젊었을 때부터 서(書)에 능하여 고려에까지 이름이 알려졌다. 비백(飛白)·전(篆)·예(隸)·해(楷)·행(行)·장초(章草)·초(草)의 서체를 자유로이 썼으나, 그 중에도 해서(楷書)가 가장 뛰어났다. 서풍(書風)은 왕희지(王羲之) 이래의 정통파 흐름을 받은 데다 새 시대의 정신을 담은 것으로 전형미를 창작하여 후세에 해법(楷法)의 모범이 되었다. 우세남(虞世南)·저수량과 함께 초당(初唐)의 삼대가(三大家)로 추앙되고 있다. 현존하는 서적(書跡) 중에서 《구성궁예천명(九成官醴泉銘)》이 가장 유명하다.
출처 : 서예 양천서루
글쓴이 : yicho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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