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긍거후
분류 | 문화/기타 > 시나리오뱅크 > 시놉시스 > 드라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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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오세창의 [근역서화징]
[등장인물]
조희룡 - 남, 60세, 조선 문인화의 영수로 [호산외사] 집필
김정희 - 남, 63세, 남종문인화의 영수
전 기 - 남, 24세, 화가이자 조선최초의 화랑인 이매당 주인
유 숙 - 남, 22세, 화가
나 기 - 남, 21세, 화가
유재소 - 남, 20세, 화가
허 유 - 남, 41세, 김정희의 제자로 화가
그 외.....
[줄거리]
1848년 5월 어느날 조희룡(60세)의 사랑방으로 유최진(58세), 이기복(58세), 전기(24세), 유숙(22세), 나기(21세), 유재소(20세)등이 속속 모여 들었다.
그들은 모이자마자 거친 숨을 몰아쉬며 김정희를 성토하기 시작했다. 어찌 사람이 그리 오만할 수 있느냐며 가만있으면 안 된다고 하며 조희룡에게 하소연을 하는 것이다. 이들이 그토록 화를 내는 건 한통의 편지 때문이다. 제주도에 유배 가 있던 김정희가 자신의 아들 상우에게 안부 편지를 보내면서 한양소식을 들었노라며 한양에서 소문난 조희룡과 그의 동료들인 벽오사 구성원들을 비난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난초를 치는 법은 예서를 쓰는 법과 가까워서 반드시 문자향과 서권기가 있은 후에야 얻을 수 있다. 또 난을 치면서는 법을 가장 꺼리니 만약 화법이 있다면 그 화법대로는 한 붓도 대지 않는 것이 좋다. 조희룡의 무리들이 내 난초 그림을 배워서 치지만 끝내 화법이라는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가슴속에 문자기가 없기 때문이다.” 라고 하며 조희룡과 자신들을 혹독하게 비난 했던 것이다.
그러자 조희룡은 화를 내기는커녕 웃으며 김정희의 아들인 김상우가 경솔했다고 말한다. 조희룡은 김정희야 원래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사람이라 그럴만도 하지만 편지를 공개해서 파문을 일으킨 김상우가 더 문제라고 한다.
조희룡과 김정희는 당대 문인화의 양대 산맥이었다. 조희룡이 일반 평민이었던 것에 반해 김정희는 양반사대부로서 왕실의 친척이었다. 그는 젊어서 아버지를 따라 연경으로 연행을 갔다가 당시 청나라의 최고의 학자로 숭앙받는 옹방강을 만나 ‘조선 제일의 인물’ 이라는 평가를 받은 뒤로는 청나라에서 돌아오자 더욱 열심히 고증학과 문인화에 열심히 매달려 이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그런 김정희를 사람들도 당대제일의 실력자로 인정했으니 오만이 하늘을 찌르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그러나 그 대척점에 조희룡이 있어서 김정희가 고답적인 중국 문인화 정신에 충실함을 고집하며 문인화를 하려는 자는 가슴속에 ‘서권기 문자향’을 담아야 하며 그것이 손가락을 타고 나와 그림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남종 문인화의 핵심이론을 그대로 받아들인 반면, 조희룡과 벽오사 구성원들도 초기에는 중국의 화법에 압도적으로 경도되어 ‘서권기와 문자향’을 기르기 위해 고련을 거듭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중국 문인화와 다른 길을 발견하게 되었다. ‘서권기 문자향’도 중요시하였지만 ‘수예론’에 입각한 손의 기량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시하였다. 김정희는 이념과 화법을 직도입하고 그것을 엄격히 지켜갔으나 조희룡과 병오사 구성원들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조선화를 시도하였다. 조희룡과 벽오사 구성원들이 관심을 가진 것은 정통 중국 남종 문인화가 아니라 조선인의 정서에 맞는 문인화, 즉 ‘조선 문인화’ 였다. 이러한 입장 차가 ‘제주도발 편지사건’의 핵심 원인이었다. 조희룡은 최근에 본 김정희의 그림을 보면서 자신과 김정희가 추구하는 그림은 주제도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김정희는 9년여 동안 제주도 유배라는 몸서리치는 좌절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기에 그는 그 과정을 통해 예술의 진정한 가치는 ‘시련을 이겨내는 인간의 의지’에 있다고 보고 그것을 ‘세한도(歲寒圖)’를 비롯한 다른 작품들에 형상화하였다. 그러나 조희룡 자신은 시서화 활동의 최고가치를 ‘즐거움의 추구’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유장한 즐거움’이 자신이 추구하는 그림의 세계이고 김정희는 ‘세한의 극기’ 를 강조하고 있다고 한다. 조희룡으로부터 그 말을 듣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을 한다. 조희룡은 다시 웃으며 그가 유배에서 풀려나면 언제 한번 만나서 같은 작품을 놓고 토론을 해 보고 싶다고 한다.
조희룡의 집에서 물러 나오던 유최진은 그 일행들에게 만약 조희룡과 김정희가 그림을 놓고 자웅을 겨루면 어떻게 될까? 하고 묻는다. 그러자 유숙이 눈을 반짝거리며 그거 좋겠다고 하며 한번 추진해 보자고 한다. 유숙의 말에 모두 동의하고는 반드시 실행시키자고 한다. 그들의 이 결의는 이듬해 김정희가 유배에서 풀려 한양으로 돌아오자 열리게 된다. 김정희가 한양으로 돌아와 2월경에 조희룡과 만남을 가졌다. 조희룡과 만난 자리에서도 김정희는 ‘서권기 문자향’의 태도를 고수하며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때도 조희룡은 유유자적하는 태도로 대응하며 김정희의 주장에 강하게 맞서지 않았다. 조희룡이 만난 김정희는 매우 까다롭고 자기확신에 찬 사람이었다. 김정희는 자기주장이 강한 인물로 논리에 있어 차이가 나면 그것을 용인하지 못하고 매섭게 공격하였는데, 특히 논리의 출발점이 청나라에서 수입된 논리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았다.
그해 5월에 조희룡이 회갑을 맞자 김정희의 제자 허유가 조희룡의 일석산방으로 찾아왔다. 19세 연하의 허유는 조희룡과 하룻밤을 지새우며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허유와 하룻밤을 보낸 후 조희룡은 허유에 대해 감탄하고 만족한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10년 동안 그림에 대해 논해 봤지만 이같이 만족스러운 적은 없다.”고 하였다. 허유는 김정희의 수제자로 나중에 허견으로 이름을 고치고 김정희의 사후에 남종 문인화의 맥을 이어간 인물이다. 김정희에겐 허유 외에도 또 다른 거물급 제자가 있는데 그는 장래의 흥선 대원군 이하응이다. 그는 김정희의 서재에 드나들며 난초그림을 배우고 있었다. 그 당시 조정은 풍양조씨와 안동김씨의 서슬퍼런 세도정치가 횡행하던 시기였다. 유력한 왕족으로 차기 임금의 후보군이었던 그는 세도정권을 유지하려는 풍양조씨와 안동김씨에겐 여차하면 거세해야할 요주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하응은 “상갓집 개” 라는 수모를 감수하면서 까지 절치부심의 나날을 보내며 기다림의 미학을 발휘하고 있었다.
조희룡이 허유를 평가한 것과 마찬가지로 김정희는 자신이 평가절하 했던 조희룡과 그의 무리들(벽오사 구성원)에 대해서도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그중에 전기에게는 직접 서찰을 쓰기도 한다.
그해 6월 조희룡과 김정희의 피할 수 없는 진검승부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지난 해부터 조희룡과 김정희의 안목에 대해 우열을 가려보자는 생각을 갖고 있던 벽오사 구성원들은 당대 문화예술계의 신진 기린아들 ‘화루 8인’과 ‘묵진 8인’의 작품을 조희룡과 김정희에게 보내 품평을 하게 한다. 당시 서화계에는 그림에 있어 일가를 이룬 대표자 ‘화루8인’과 글씨에 있어 일가를 이룬 대표자 ‘묵진8인’이라는 14명의 젊은 인사들이 있었다. ‘화루 8인으로는 전기, 유재소, 유숙, 김수철, 이한철, 조중묵, 허유, 박인석이 있었고 ‘묵진8인’으로는 전기, 유재소, 김계술, 이형태, 유상, 한응기, 이계옥, 윤광석이 있었다. 벽오사의 일원이었던 전기와 유재소는 이 양대 8인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들 14명은 각기 자신들의 그림과 글씨를 조희룡과 김정희에게 차례로 보낸다. 그것은 조희룡과 김정희를 당대 서화계의 최고의 원로로 인정한 것이다.
조희룡은 ‘화루8인’의 작품에 화제시를 써 주고 김정희는 ‘화루8인’의 그림과 ‘묵진8인’의 글씨에 비평을 해 준다.
조희룡은 각 작품에 대한 평을 호의적으로 해주었다. 서로의 친분관계도 있었지만 각기 나름대로의 성취를 이룬 인물들이었고, 이번 일을 위해 각자 최선을 다해 그림을 그렸기에 그 자취가 뚜렷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희룡과는 달리 김정희는 여전히 자신의 취향과 주장에서 어긋나느 그림은 철저하게 비판을 한다. 가히 김정희의 성격을 엿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조희룡과 김정희, 그리고 그 두 사람을 따르는 후배와 제자들은 이 경쟁을 계기로 서로 상대방을 인정하게 된다.
전기와 유재소는 ‘화루8인’과 ‘묵진8인’이 서화계의 양대 산맥인 조희룡과 김정희에게 받은 평가를 모아 책자로 엮으니, 그 이름이 [예림갑을록]이다.
이 예림갑을사건을 계기로 조희룡과 김정희는 화해하고 서로 왕래를 하게 된다. 그러나 두 사람의 화해는 조희룡에게는 득보다 실이 더욱 많았다. 2년 뒤 헌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하자 세도를 잡은 안동김씨 일가에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인 김정희를 비난하며 처벌할 것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평소 유아독존적인 사고방식의 김정희는 조정의 일에도 자신의 생각과 같지 않다고 비판을 일삼곤 했었다. 그것이 결국은 김정희에게 화를 불러 왔던 것이다. 더구나 김정희와 친분이 있던 액정서 소속의 조희룡을 김정희의 심복이라 하며 함께 처벌할 것을 철종에게 주청한다. 결국 철종은 김정희를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보내고, 조희룡은 전라도 신안 임자도로 유배를 보내게 된다.
조희룡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김정희와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유배를 당한다. 더구나 안동김씨와 세상사람들은 조희룡을 김정희와 나란히 보지 않고 심복으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김정희가 왕족의 친척으로 권력의 핵심부에 있었기에 평민 출신인 조희룡을 김정희의 아랫사람으로 본 것이다. 더구나 이 유배사건을 근거로 후세의 사가들도 조희룡을 김정희의 평가하게 되니 저세상에서 조희룡이 이 사실을 안다면 통탄할 노릇이다. 조희룡에게 김정희란 존재는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극복의 대상이기도 했던 진정한 라이벌이었다.
참고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불긍거후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여항문화), 2004,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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