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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必讀>나평(羅平) 과 홍하(紅河).

충암 이영길 2016. 9. 16. 21:25

나평(羅平) 과 홍하(紅河).

 

 

 

유채(油菜)는

봄철에 그 특유의 노란색 꽃을

흐드러지게 피우는

겨자과(科) 의 두해살이 식물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유채밭은

제주도의 성산일대에 있다.


줄기높이 1미터 정도의 유채는

봄에

원줄기 끝에 노란꽃이 피며

꼬투리는 길이 8센티 정도의 원통형으로

익으면

벌어져 검은 갈색씨가 나온다.


이 씨로는 기름을 짜며

주요한

밀원식물(蜜源植物 - 꿀벌이 꿀을 빨아오는

근원이 되는 식물.) 이기도 하다.

 


다른 이름으로는

대개 (臺芥), 또는 '평지' 라고 한다.

이 유채밭의 크기가

서울면적의

6배에 이르는 규모라면 믿을수 있을까.
실제로

그렇게 넓은 유채밭이 존재할수 있을까.
그런데

그게 정말이었다.


중국 남서부의 운남성(雲南省).
그곳의

나평(羅平) 지역에는

평지기준 30만 무(畝) 의 유채밭이 있는데

우리기준으로 환산하면 9억평(坪) 의 넓이다.


산지에 있는

유채밭까지 합하면 46만무,

실로 13억9천평의 넓이다.

그건

유채밭이 아니라

끝이 없는 유채꽃의 바다였다.

그 장관을 한마디로 설명할수는 없다.

아니 불가능하다.
탄성이 절로 나왔고

벌어진 입을 다물수가 없었다.

 


성도(省都) 곤명(昆明) 에서

버스로 8시간 이상 가야하는 오지.
그곳의

들판과 산의 다락밭은

유채꽃으로 완전히 덮여 있었으며

평지의 유채줄기는 내 키를 넘는 크기였다.


공기까지도

노란색으로 느껴질 정도로

그 규모는 엄청났으며

유채밭 사이사이에

섬처럼 떠있는 작은 언덕들은

그 푸른색으로 하여

더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년간 생산량은,
유채씨가 4천만kg.

꿀이 1.500톤,

봉왕장(로얄젤리)이 1.000톤 규모이며

씨를 털어낸 줄기는

밭에서 태워 비료로 쓰기도 하고

일부는 화목으로,

일부는 가구점에 보낸다고 했다.

이 엄청난 유채밭은

주로

나평지역에 살고있는 소수민족인

보이족 (布依族)

3만 4천여명이 경작한다고 했다.


이렇게 적은 인원으로

넓은지역의 경작이 가능한것은

우리처럼

일일이 모종을 심는것이 아니라


씨를

그대로 밭에 뿌리는

경작방법을 쓰기 때문이며,

대신

수확은 전부 사람의 손으로 한다고 했다.

 


특히

나평지역의 유채밭이 유명한것은

이 지역의 습도가 높고

안개의 발생빈도가 높아
꽃을 볼수있는 기간이

60여일에 가깝기 때문이라고 했으며

이는

타 지역의 두배가 넘는 기간이라고 했다.


그건 정말,

쉽게 볼수없는,

일년에

단 한번 봄철에만 볼수있는

중국땅의 장관이었다.

 

이 지역 자체가

전문 사진작가들에 의해

비로서

알려지기 시작했을 정도의 오지 이기도 하다.


유채꽃 속에 서서

저 멀리

유채밭 끝자락으로 지는 해를 보며,
언덕

에서

한 노인이 얼후를 연주하며

부르는 노래를 듣고 있노라니

그 처연함은 비감하기 까지 했다.


평생에

다시 이렇게 넓고

아름다운 유채밭은 보지 못할것이다.



운남성(雲南省) 은,
글자 그대로

구름의 먼 남쪽에 있는 변방,
그러나

중국에서는 4번째로 큰 성이다.


서쪽으로는 미얀마,

남쪽, 남동쪽으로는

라오스, 베트남과 인접해 있다.


대부분이

표고 1500이상의 고 지대이며

넓이는 43만 6000 제곱키로미터다.
동부는 고원,

서부는 대종곡지대(大縱谷地帶).


기후는

수직적 차이가 크며

남부의

하곡(河谷) 은 열대의 몬순기후지만

북부의 산악지대는 한대성 기후다.


성도(省都) 곤명의 표고는 1992미터,
이 지역에서의

갖가지 세력분쟁은

원대(元代 1279-1368) 에 이르러 마무리 되었다.

 

1253년 몽골족은

남조(南詔)를 무너뜨리고

이곳을

중국제국의 성(省) 으로 편입시켜
운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949년 이래

중화인민공화국은 운남성을

중국에서

최우선적인 산업지대로 만들었으며


1960년

중국,미얀마 조약이 맺어짐에 따라

두 나라사이의 국경분쟁도 끝이났다.


특히

1999년의 '꽃 박람회' 를 통해

운남성은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다락' 이란 재래식 가옥에서,
부엌위에 이층처럼 만들어

물건을 넣어두는 공간을 이르는 말이다.

 


다락밭은

산의 경사면을 이용,

계단식으로 만든 경작지를 의미하며

벼를 재배하는 경우 다락논이 된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다락밭이나

다락논을 만드는 경우

십여계단 미만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그 다락논이

십계단이나 백계단이 아니고

천계단 단위라면 그걸 믿을수 있을까.
눈으로

직접 보기전에는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평균고도 1600 의

운남성 홍하(紅河) 지역에는

1400 여년전 당(唐) 나라 때부터
하니족(含尼族) 이 축조한 계단식 논이

그 웅장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중국정부가

풍경구(風景區) 로 지정한 면적만도

8000 무(畝),

2400만 평이며

홍하지역 전체로는 19만무,

즉 5억7천만평이나 된다.

이곳에서는

풍작일 경우 약50만톤의 쌀이 생산되며

일모작 농업이다.



원양(元陽) 에 도착한후,
바로

노호구(老虎口) 로 가서 보게되는

일몰장면과

멀리 아래에 펼쳐진 계단식 논들의
놀랍도록

아름다운 모습은 감탄이 절로 나왔다.


사진을 찍을

엄두가 나지않는 일대장관이었다.


이튿날 새벽

도이수(多衣樹) 에서 보게되는

일출은

해가 올라오는 시각에 따라

다락논의 물이 신비한 색깔로 변해가는

장관이 연출된다.


어떤

인공적인 영상이라 해도

그렇게

아름다울수는 없을 것이다.
그건

정말 놀라운 장면이었다.

 


그리고 '빠다',
빠다는

하니족 말로 '어깨' 라는 뜻이다.

조상대대, '어깨' 로

흙을 날라

다락논을 만든 역사가 담겨있는곳.


거기에는 실로

'삼천단-삼천계단' 의 다락논이 있었다.
그 장엄한 모습은

절로 경외심을 가지게 했다.


중국정부는 그곳을

'紅河含尼梯田-Honghe terraced fields' 라고 부른다.

경사각도

15 에서 75 까지의 가파른 산에

단지

인간의 손으로 1400 여년에 걸쳐

그 엄청난 역사를 이루어 낸 것이다.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UNESCO 는

사람의 손으로 만든 이 지역을

인류의 '자연유산'으로 지정했다.

하니족은,
운남성 남서부 높은 고원지대에 살고있는

소수민족이며

특히

고원의 남서부에 집중적으로 모여산다.

 


하니족은

오스트로아시아 인종의 요소가 강한

티베트 미얀마 계통이다.


이들은 원래

보다 큰 이족(彛族) 집단에 속한

하나의 부족으로 분류된다.


하니족은

티베트에서 이주해온 최초의 이민족으로

한대(漢代)에 중국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몽골족의 침입을 피해 도망온

타이족에게 밀려

서서히 이 지역으로 이동했으며
티베트 미얀마

어군에 속하는 방언을 사용한다.


해발 1400-2000 미터 지역에서

다락논을 조성, 경작하고 있으며

평균기온 섭씨15도,
년간 총일조량은 1.670시간이라고 했다.


원칙적으로 다락논은

평지인 아래에서

위쪽으로 만들고 있으나

지역에 따라서는 위에서 아래로
조성하는 경우도 있다고한다.


놀라운 것은

그 넓은 다락논에 필요한 물을

전부

산 위쪽의

지하수에서 얻는다는 사실이었다.

 


하니족의 경우,
61.453개의 물줄기를 확보하고 있었고

662개의 저수시설을 이용,

위에서 아래까지 물을 공급하고 있었다.

 

중국정부는

비나 안개에서 대량의 수분을 흡수,

지하수 형성에

뛰어난 기능을 가지고 있는
수동과(水冬瓜) 나무를 계획조림하고 있었다.

 


이 놀라운 다락논은

1980년 부터 서구인 학자들과

사진작가들에 의해 알려지기 시작했으나
워낙

깊은 오지이기 때문에

일반 관광객은 거의 없는 편이다.


하니족 마을에서 직접 보게된 벼는,
우리벼가

둥글고 황색이라면

그 벼는

가늘고 뾰죽했으며 푸른빛이 돌았다.


그 쌀로 지어놓은

밥은 전혀 찰기가 없었고

흡사

보리밥을 먹는것 같았다.


그러나

'제사밥' 으로 지은 노란색의 찰밥은

고추장을 발라 먹어보니 아주 맛이 좋았다.


논에 모를 심을때

그일은

반드시 여자만 할수있다고 했으며

아마도

이는 생식기능에 대한
상징적 의미가 있는것 같았다.


그들은

아직도 재래식 주택에서

자기들만의

전통적인 방법으로 생활하고 있었는데
그 오지에 까지

전기가 들어온 것을 보면서

중국의 힘을 느꼈다.



이번 운남성의 나평과 홍하지역 여행은
테마세이투어 의 'Mania Only' 프로그램이었다.
하루에

10시간에서 12시간까지

버스를 타고가는 오지.


게다가

상대적으로 높은 여행비용 으로는

모객(募客) 이 어려운,

상품화가 쉽지않은 케이스였다.


그러나

볼것만 분명하다면

그 모든것을

감수하고 나서는 매니어도 있는법.


그리고 일년에

단 한번만 기회가 주어지는 시기성 때문에

여행매니어가 아니면

어려운 여행 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대만족.
두곳 말고도

오지 마을의 장날이나

시장을 둘러보는 재미는 각별한 것이었다.
우리의

전 세기가 거기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말은

단 한마디도 통하지 않았지만

몸짓과 웃음만으로 모든 거래가 가능한,

우리와 똑같은
'사람' 이 사는 곳이었다.


끝을 알수없는 유채밭과

인간의

위대한 손이 만들어낸 3천단의 다락논.
평생에

그런곳을 직접가서 볼수 있었다는것

자체가 행운이었다.
특히

날씨가 좋았던 것은 더 큰 행운이었다.



'테마세이투어-Themesaytour' 에는

세가지가 없다.


그 하나는

여행경비를 지불한후

그 어떤 잡비도 다시 거두는 일이없다.

 

다른 하나는,
버스안에서 마이크를 잡고하는

자기소개와 노래자랑이 없다.
물론

버스안에는 음악도 없다.


비싼돈 내고 왔으니

자연을 보고,

자연을 듣고,

사색하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쇼핑이 없다.
테마세이의

이 차별성은 이미 성공을 거두고 있다.


머리가 깬,

개성적인 여행객들이

오래동안 겪어온 고통을 제거해 버린것이다.


그러나,
숙, 식, 세세한 부분까지의

대 고객 서비스는 단연 일류다.


결코

다른 여행사들이

쉽게 따라올수 없는 수준이다.


비싼돈 내고도

그게 비싸다고 느끼지 못할정도니

장사는 제대로 하고있다는 얘기다.


테마는,
내년 3월에도 나평과 홍하에 갈것이다.
그곳에

꼭 가 보라고 권하고 싶다.

 


세상천지에

그런곳이 있다는것을 봐야한다.
그 어떤 설명으로도,
그 어떤 사진으로도 그곳을 전달하지 못한다.
가서 봐야한다.


'테마세이투어' 는,
www.themesaytour.co.kr
02)734-1800 이다.


그들이 제대로,

잘 하기 때문에 널리 알리고 싶다.


by/yorowon


 

 

출처 : 정든 삶,정든 세월
글쓴이 : 地坪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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