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무지개 / 충암 이영길
順命의 시간을 덜어낸
남아있는 삶의 시간 얼마나 되랴
봄여름 지나고
고운 단풍마저 시든 늦가을 어느 날
우수수 지는 노란 은행잎을 보며
인생의 가을도 저물고 있음을 느낀다.
가을은 아름다움과 풍요 뒤에
아쉬운 이별의 그림자를 남기고 가듯
삶을 돌아보면 그립고 아름답고
아프고 괴로운 일 얼마나 많은가
인생은 예행이 없는 운명의 길
서툰 걸음을 어찌 탓할 수 있으랴
낙엽 지운 고목처럼
욕망과 번민을 털어내면
마음의 공간 그리움도 밀어내고
청정한 무심의 호수 허허로운 허공
인연의 실개천엔 인정의 물안개 솟아
노을빛에 곱게 뜨는 인생의 가을 무지개
2008. 10. 22
가을 香氣 / 㳘岩 李榮吉
누더기 봉지 옷을 벗은 뽀얀 사과 볼이
가을 햇살에 빨갛게 익어가는 과수원을 지나
눈에 익은 산길을 오르면 시원한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노래 서걱서걱 들려오고
높푸른 하늘가 시선마저 잦아들어
그리움 맴돌다 멈춰선 아득한 창공
아른아른 하얀 새털구름 얇게 펴고
세월의 자취를 지우며 유유히 흐른다.
방울방울 솟는 연민에 젖은 가슴은
포근한 정 솟아 풍기는 고운 향기가
만지다 조각난 마음의 편린에 묻어나
영혼의 선율에 실려 가는 편지가 되고
단풍잎 곱게 물드는 아름다운 가을
여름내 달군 시름을 식힌 마음 빈자리에
스며든 그리움이 연민의 향기로 번져나
마음의 가을이 단풍보다 앞질러 물들고 있다.
가을 산 / 바위샘 이영길
지긋이 눈감고 졸고 있는 머리위로
아른아른 새털구름 가려주는 파란 하늘
계절을 잃어버린 따가운 가을햇살에
스르르 눈감고 낮잠 자고 있는 산
후줄근한 품속을 헤집고 들어서면
후드득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
길섶 야생화의 배시시 웃음 짓는 소리
도란도란 소곤대며 흐르는 계곡물 소리
아련히 살아나는 그리운 소리
어머니 품안에 소곳이 안기면
마음을 타고 들려오던 심령의 소리
산은 어머니 마음으로 가슴을 열어준다
바위틈에 피어나는 구절초의 하얀 꽃망울
음습한 풀냄새에 젖은 야생화 향기
아버지 등처럼 미덥고 편한 능선을 토파
그리움으로 저린 발걸음으로 산을 오른다.
가을이 오는 소리 / 충암 이영길
백일홍 꽃술에 빨간 그리움 물들이고
아쉬움 남긴 채 지나간 여름의 잔영위로
마음결에 사르르 울려오는 가을의 소리
석류가 붉게 익어 주렁주렁 늘어지고
대추알 발그레 익어가는 언덕
밤나무엔 알밤이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는데
마음을 흔드는 가을의 소리는
추억의 징검다리를 성큼성큼 건너서
그리움 안고 다가와 잠든 기억을 깨운다.
별빛이 푸른 귀뚜라미 우는 밤
밤이슬은 풀잎에 살포시 맺히고
어두운 허공에 하얀 그리움으로
덧칠해 그려보는 보고픈 얼굴들
이 가을에 만나서 회포를 풀며
기쁨으로 인생의 가을 한 폭을 그리고 싶다.
2008. 9. 3.
감 / 충암 이영길
감이
주홍색 감이
탐스레 익어간다
묘목을 사다가
화단에 심은 감나무에
올해 처음 감이 달렸다
시름시름 떨어지고 남은
듬성듬성 달린 감이 튼실해져
주홍빛깔로 곱게 익어간다
아침에 일어나 바라보노라면
먼저 찾아온 손님 개똥지빠귀
가지 옮겨 앉으며 분주하고
흰둥이는
홍시 탐하는 손님 속내 알아차렸는지
깜냥 하느라 컹컹 짖는다.
2008. 11. 3.
겨울비 내리는 창가에서 / 충암 이영길
어둠새벽 높바람 타고
철겹게 내리는 겨울비는
바람에 흐느끼며 복받치는 설움
유리창에 눈물 줄줄 흘리는데
창밖 앙상한 단풍나무 가지엔
동글동글한 수정 같은 물방울이
망울망울 맺혔다 주르륵 떨어진다.
성근 빗소리에
잠깬 추억의 가몰한 그리움 저편
아련히 떠오르는 정겨운 얼굴
농한기 내리는 겨울비는 술 비라며
힘들고 모진 삶을 한잔 술로 달래며
거나해서 흥겨워하시던 아버지
힘들수록 희망의 끈을 꽉 잡아라.
이르던 말씀 귓전에 맴도는데
아버지가 살고가신 세월보다
많은 세월을 살고 있으면서도
마음속엔 작고 철없는 어리석은 내 모습이
그리움에 촉촉이 젖은 채 외로움에 지척 인다.
기다림은 희망인 것을 / 충암 이영길
황금빛 침엽을 낙엽지우고
쭈뼛이 서있는 낙엽송가지 사이로
밝은 햇살이 선을 그으며 쏟아져 내리고
가는 낙엽은 바닥에 황금융단을 펼친다.
나무 끝에 걸린 하늘은 티 없이 파랗고
솔잎에 맺힌 이슬 구슬처럼 영롱한데
다르면서 동화되어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자연에 매료되어 다가서면
마음속엔 따사로운 햇살이 밝게 비춘다.
때로는 외롭고 슬픈 삶의 여정에
바람처럼 스치는 기쁨과 행복을 아쉬워하고
가슴 죄는 사랑에 애태우지만
가슴속 퍼내도 마르지 않는 그리움은
지난 세월 추억의 흔적을 촉촉이 적셔주고
길섶에 늦게 핀 들국화의 노란 꽃송이
방긋이 웃으며 향기로 가을 끝자락 잡는데
마른 억새는 바람결에 서걱서걱 노래하네.
삶의 여정은 기다림이 반이고
기다림은 희망이고 참아냄 이라고
斷想 / 충암 이영길
어둠에 가라앉았던 밤을 밀치고
하얗게 밝아오는 여명
새벽 별빛도 잦아든 공간을
뽀얀 안개가 짙게 메우고 있다
강둑엔 싸한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고
흐트러진 갈대의 서걱 이는 몸부림은
여울의 아우성에 묻혀간다
외로움으로 뚫린 가슴
휑한 구멍에 새는 그리움은
굽이도는 강물에 물빛으로 반짝이고
흐르는 세월의 강에
텅 빈 마음을 달아 낚싯대 드리우면
사색의 파문에 움직이는 찌
행복의 보드라운 감촉에 줄 당기면
번쩍 포물선을 그으며 찢어지는 삶
어지러운 일상의 파노라마가 펼쳐지고
안개 걷힌 평화로운 강 언덕엔
초겨울 엷은 햇살이 쏟아져 내린다
마음의 항해 / 충암 이영길
사랑에 멈췄다 돌아서고
아픈 상처에 주저앉아
애련의 봉우리에 부딪쳐 흩어지고
정처 없이 흘러가는 구름 같은 마음이여
외로움에 가위눌린 슬픔은 새고
세월의 그림자에 가린 쓸쓸한 그리움은
퇴영된 욕망의 잔해를 남긴 채
휩쓸고 지나가는 바람 같은 마음이여
체증처럼 갑갑한 울분이 분출되어
분노의 불길이 감성을 태워 후회의 그을림을 남기고
하얀 눈처럼 쌓이는 슬픔에 덮여 연민의 불씨를 남긴 채
꺼져가는 불길 같은 마음이여.
메마른 가슴을 촉촉이 적시고
겸손과 사랑의 나무에 물 올리어
저 낮은 곳을 향하여 쉼 없이 흐르는
차고 맑은 물처럼 흘러가는 마음이여
인생은 마음의 긴 항해
고요한 명상의 바다에
오늘도 영혼의 배를 띄워
행복의 피안을 향해 조용히 배를 저어간다
만남이 행복인 것을 / 충암 이영길
푸른 호수는 시원한 가을바람에
물비늘 반짝이며 살랑살랑 춤을 추고
멀리 이어진 물길 너머로
웅장한 월악산이 한 눈에 들어오는
풍광이 아름답고 이름고운 물빛나루 식당
병아리 공무원시절 연이 닿고 마음이 맞아
모임을 갖고 30여 성상 애환을 엮어온
퇴직한 친구들이 먼 길 마다않고 모였다
이젠 백발이 성성하고 좋아하던 술 담배 끊고
병치레에 몸이 불편한 친구도 생겨나고
그래서 만나면 반갑고 기쁜 마음 더해지고
소주 몇 순배 돌고나면 오가는 정담
화려했던 젊은 날의 옛이야기에
호기를 부리고 호탕한 웃음을 웃지만
주름진 얼굴에는 애잔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흐르는 세월 속에 묻혀가는 인생인데
만남이 행복임을 느끼는 지혜로움은
세월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 아니랴
노을 지는 생명의 호수 행복의 물결에
만남의 배를 띄워 기쁨의 노를 저어본다
2008. 9. 5. 종민동에서
맥추(麥秋) / 충암 이영길
망종 지나 하지 다가오면
계절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아
푸른 언덕아래 누렇게 익은 보리밭
시원한 바람에 황금물결 일렁이고
보리매미 울음소리 정겹게 들려온다.
보릿고개 모진 설움 잠시 접고
농부의 얼굴에 감도는 소박한 웃음
한 줌씩 베어내는 낫질에 늘어나는 보릿단
지개에 꾹꾹 눌러 저 나르면
마당 가득 쌓이는 보릿가리
시큼한 농주 한 사발 마시고
자리개 줄로 보릿단 둘러 묶어
누인 절구통에 좌우로 메어치면
우수수 떨어지는 보리 톨
줄 풀어 던지면 도리깨로 돌려 치고
땅거미 지는 어둑한 냇가에 불 피우고
까라기 태운다고 벗은 옷 불에 휘젓고
잠방이 허리춤 잡고 불 위로 뛰어넘던
그리움 질퍽이는 추억 속을 헤매는데
어느새 트랙터가 보리밭을 뭉개버렸다
물봉선화 피는데 / 㳘岩 李榮吉
산골짝 응달진 도랑가에
무성히 자란 물봉선화
붉은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한여름 마디마디 매듭진 애틋한 그리움
겉으로 배어나 붉게 물든 줄기
살짝 부끄러워 푸른 잎으로 감추고
가을바람 산울림으로 다가와
살며시 흔들면 가는 꽃대 올려
빨간 꽃술로 활짝 웃는 물봉선화
스치는 바람에 가녀린 춤사위로
살랑살랑 꽃물결 흥겹게 출렁이면
번지는 들꽃향기에 가을은 깊어간다
바다의 愛憐 / 충암 이영길
바다는 푸른 바다는
늘 푸르고 젊구나.
산골에서 자라나 무척이나 바다를 그리워했지
그리운 모습 가슴 벅차게 다가설 때
힘차게 너울져 몰려오는 파도는
해안에 부딪쳐 하얀 포말로 부서지고
운명처럼 다가온 해맑은 눈동자의 소녀
밤하늘 별들의 속삭임처럼
해변을 거닐며 쏟아놓는 달콤한 밀어에
까만 밤 하얗게 밝히며 모래알 같이 흩어져간
낭만과 사랑의 젊은 날의 가슴 설렌 추억은
굽이돈 삶의 응달에 얼어붙어버렸다
잡았던 손 풀고 돌아선 자리
자석처럼 달라붙는 발걸음 앞에
추억의 파도는 와르르 보고픔을 풀어놓고
세월의 썰물에 아득히 밀려간 그리움은
외로움의 등걸에 안개꽃으로 피어나
마음의 사랑방에 촉촉한 향기를 풍긴다.
청간정 누마루에 석양이 깃들고
가몰한 물마루 너머로 붉은 놀 물드는데
황금빛 파도는 너울져 몰려와 철썩
바닷가에 부딪고 하얀 거품 토한다.
바다는 푸른 바다는
언제나 젊고 힘차구나. (2008. 8. 5.)
구름아 바람아 / 충암 이영길
구름아 바람아
어디로 가는가?
유유히 흐르고 스쳐가는
거침없는 네가 부럽구나.
가야할 길,
삶을 지고 가야할 길, 얼마나 남았을까
파도에 쓸려간 모래톱처럼
젊음이 쓸려간 세월 뒤편에서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푸른 별빛이
뜰아래 옥잠화의 하얀 웃음에 닿아
은은히 번지는 애잔한 슬픔을
가슴에 여미는 나이가 되었구나.
정으로 인연으로 얽히고설킨
질퍽이는 인생길은 아직도 수렁인데
시끄러운 세상 눈 지그시 감고서
여유로운 헛기침에 허허 웃고 돌아서서
차려진 삶의 아름다운 색깔 골라
생명의 공간에 그릴 그림 한 장
소박한 감사와 사랑의 물감으로
따사롭고 곱디곱게 그리면서
애착도 미련도 훌훌 벗고
아름답게 노을 지는 하늘 열고
바람아! 구름아!
너 따라 가고프다
바람이어라 / 충암 이영길
삶의 시간을 휘감아 간 세월
나무 사이를 스쳐가는 바람결에 한 해가 휘감겨 저물고
삶의 무게에 눌려 처진 어깨위로 엷은 겨울 볕이 스르르 감기면
눈물에 얼룩진 가슴 밑창에서 토해내는 한숨 소리 새어나고
세파에 언 민초의 가슴에서 울려오는 신음이 메아리치는
어둑한 그림자 드리우는 세모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어라
인고의 어둠이 사라지고 서기어린 여명의 새날은 밝아 오리니
절망의 나락에서도 믿음의 씨줄에 희망의 날줄을 엮어
아름다운 삶 밑그림에 수를 놓으리라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고난이 지나면 행복이 오리니
황소의 기상처럼 밝아올 새해
민초의 힘겨운 어깨위로 따사로운 봄 햇살 비추고
언 가슴 녹일 훈풍이여 불어라
산그늘 / 충암 이영길
초여름 햇살이 갸웃이 기울면
산그늘 살며시 따라와 감싸 안는다
산 그림자는 언덕도 나무도 개울도
거침없이 덮어버리는 저항 없는 점령군
따가운 햇볕에 지쳐 너부러졌던 나뭇잎
산그늘 반기며 생기가 도는데
장끼 한 마리 놀라서 후다닥 날고
도랑물은 도란도란 소곤대며 흐른다.
산마루에 걸친 해가 빨간빛을 토해내면
여름 날 하루가 놀빛 속에 잠겨들고
가슴속 허기진 그리움은
사랑하는 당신을 향해 달려갑니다.
우리 살면서 가슴에 담아놓은 이야기
입속에 가둬놓고 말 못하고 삼켜버린 이야기
망설이다 마음속 깊이 감춰버린 이야기들을
까만 밤 반짝이는 별들의 속삭임처럼
삶을 지우는 까만 그늘이 덮이기 전에
하나도 빼놓지 않고 듣고 들려주면서
당신 손 꼭 잡고 들려주고픈 말
당신 가슴에 새겨주고픈 말
“당신을 사랑합니다.”
인생갈피에 끼운 슬픈 가을이야기 / 충암 이영길
날선 하얀 서릿발이 들풀을 시들게 하는 아침
샛노란 들국화는 움츠린 채 웃고 있다.
침묵의 슬픔을 싣고 달리는 차창 밖으로
벚나무 이파리는 피를 토하듯 빨갛게 물들고
어슴새벽 애통으로 얼얼한 가슴
찬바람에 쓸어내며 구비 도는 호수길
뽀얀 물안개가 망울망울 솟아나는
넓은 수면위엔 하얀 휘장이 펼쳐지고
방황하는 마음을 얹은 혼돈의 시간마저
능수버들 가지를 휘어잡고 흔들고 있다
외진 산골 오르막길 위에 자리한 天上園
영혼 떠난 육신은 한줌의 재로 남겨지고
울부짖는 가족들의 애절한 절규는
가슴에이는 진혼곡이 되어 메아리치는데
따사로운 가을 햇살 엄마 손길처럼 포근히 감싸고
병풍처럼 둘러친 산에는 곱게 단풍이 물들고 있다
이 세상 삶에 힘들고 지쳤던 영혼
하늘나라에서 평안하길 기도하며
인생의 갈피에 슬픈 가을이야기를 끼운다.
<2008. 10.11. 季嫂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와서>
할머니와 유모차 / 㳘岩 이영길
돌담사이 좁은 길
등 굽은 할머니가 낡은 유모차를 밀고 간다.
아기 앉혔던 자리는 망가지고 바퀴도 닳고
고철이 다 된 늙은 유모차는
아기 울음 멎은 한적한 산골
할머니의 지팡이를 대신하고 있다
유모차 너머로 얼굴 내민 채로
조금 가다 쉬고 또 가다 쉬고
유모차를 밀고 가는지 끌려가는지
할머니 발걸음이 힘겹고 애처롭다
동구 앞 정자나무 그늘엔
유모차 두 대와 할머니 두 분이 앉아 있다
정든 집 구석구석 묻어나는 추억이
오히려 살을 에는 외로움의 칼이 되어
메마른 가슴을 난도질 칠 때면
유모차를 밀며 힘든 여정을 떠나 닫는 곳
말하기도 힘겨워 손으로 건네는 수인사
서로 얼굴만 보아도 위안이 되는 할머니들
덩그런 느티나무 가지엔 매미가 울고
개울물 도란도란 속삭이며 흘러가는 산골
싱그러운 자연은 아름답건만
생각만 해도 정겹고 그리운 고향은
그리움 스친 자리마저 사치인양
외로움의 한기가 감돌아 서글퍼진다
자귀나무 꽃 / 충암 이영길
눈물보다 더 슬픈 보고픔이
푸른 잎줄기 헤치고 솟아나
보석햇살 향해 배시시 웃는 꽃
가슴 에이는 애틋한 애련이
천 갈래 찢겨진 그리움으로 배어나
세실처럼 가는 붉은 꽃잎이 하늘대는
초여름 더위에 곱게 피는 자귀나무 꽃
자잘한 이파리 줄기줄기 받쳐 들고
스치는 바람에 살랑살랑 춤추다가
어둠이 다가서면 수줍어 잎을 접고
툭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울음을 삼키며
먹빛으로 그을리는 밤 잠자는 자귀나무
여름을 그리며 여름을 사랑하는 너는
속내 다 털지 못하고 눈부신 햇살에
새까맣게 타는 기다림을 품은 채
붉은 미소로 그리움을 묶으며 서 있구나.
지나고 보면 그리워지고 / 충암 이영길
살다 보면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그리워하고
미워 하지만
어차피 인생은
슬픔 반 기쁨 반
오르막 반 내리막 반
뒤섞여 가는 길
기쁘고 쉬울 때도
슬프고 힘들 때도
지나고 보면
모두 그리워지고
사노라면
아늑한 행복
가슴 에이는 슬픔
만남의 설렘
이별의 아픔
애타는 조바심
느긋한 여유
지루한 기다림
세월 갈피갈피
달고 쓰고 시고 떫은
맛으로 절어서
지나고 보면
모두 그리워지고
다시 그렇게 살아가는 길
淸流에 발 담그고 / 㳘岩 李榮吉
계곡 암반위로 흐르는 맑은 물에
살며시 발을 담그면
맑은 물속엔 파란 하늘이 내려와
다리사이로 흰 구름이 흘러가고
휘~이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일렁이는 물결이 하늘을 지운다.
개울가 비탈엔 한 송이 도라지 꽃이
하늘을 향해 보랏빛 안테나를 세워
사랑의 기별을 기다리고 있고
미처 눈길 주지 못해 보지 못했던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바람결에
한들한들 고개 숙여 아는 체한다
물처럼 흘러가는 인생길에
삶의 먼지를 털고 바라보면
모두가 곱고 사랑스러운걸.
허상을 보고 밀고 다투며 사느라
메마른 마음 밭에 먼지만 일궜나보다
머물지 않는 세월의 지우개는
삶의 시간을 지우고 있는데
맑은 물에 발 담그고 세진을 털며
영혼은 아름다운 仙境에 들어
칠월의 더위를 잊고 豪奢를 누린다.
겨울 소묘 / 충암 이영길
거친 검은 살결을 드러낸 들판과
까칠해진 산등성이 사이를 지나
산모퉁이 비탈길을 돌아서면
시커멓게 찌든 스레드지붕의 오두막집
비딱한 굴뚝에 저녁연기 피어오르고
나무 타는 상긋한 냄새에 울컥 솟는 정감
마당 한쪽 두엄더미 매어놓은 송아지
석양을 받고 꼬리치며 움메~에
그리던 고향은 와락 나를 안아 주는데
세월의 그림자에 묻힌 그리운 얼굴들
마음은 어릴 적 그리움으로 지척이고
낯선 시선에 추억의 회상마저 멈칫해져
뉘엿뉘엿 지는 석양을 바라보니
언덕바지 감나무에 까치밥 네다섯 개가
아름다운 노을빛 사이로 앙증맞게 달려있다
푸른 숲으로 가자 / 충암 이영길
뽀얗게 감긴 안개가 걷히면
산들바람이 나뭇잎에 사뿐 안자서
살래살래 손을 젓고
새들이 우짖는 청아한 소리 가득한 숲
어레미처럼 송송 뚫린 마음 구명으로
외로움은 줄줄 새어나가고
텅 빈 허전함이 체증으로 가슴 메이면
푸른 숲 맑은 공기 넉넉한 품속에
고단한 영혼을 편안히 누인다.
매미소리 풀벌레소리 바람소리
도랑물 흐르는 소리 다람쥐소리
청력으로 감지되는 모든 소리를
사유의 범주 밖으로 흘려보내고
풀들의 속삭임 나무들의 이야기
흙과 바위와 샘물의 이야기를 듣는다.
마음으로 듣는 소리 자연의 소리에
나무가 되고 바람이 되고 샘물이 되면
바위틈을 흐르는 샘물 같이 맑은 영혼
푸른 숲으로 가면
아름다운 푸른 숲은 지친 영혼의 휴식처
행복 보듬기 / 충암 이영길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찬란한 황금마차에 실린 빛나는 보석처럼
절로 찾아오는 행복이 있으랴
밀려오는 삶의 喜怒哀樂 속에서
찾고 보듬고 누려야할 행복인 것을
따뜻한 마음이 감사와 사랑으로 촉촉이 젖을 때
가슴에 차오르는 충만감과 기쁨이 행복이라면
아스팔트 틈새를 비집고 노란 꽃을 피워낸
민들레의 질긴 생명력에서도
달개비 파란 꽃에 묻어나는
앙증맞고 모진 생명의 기억에서도
마주 앉은 아내의 눈가에진 잔주름을
연민의 눈길로 바라보면서도
아이의 울음소리와 해맑은 얼굴에
배어나는 귀여운 모습에서도
가슴에 은은히 번지는 기쁨과 감동을
느끼고 보듬을 수 있지 않을까
삶의 광장에 부딪히는 감정의 편린들
괴롭고 슬프고 아프고 즐겁고 신나고
욕심 부리고 피하고 다투고 웃고 화내는
감정의 출렁임 속에서 기쁨과 감동을 모아
사랑으로 씻고 닦아서 보듬는 것이 행복이요
살피고 찾아서 누리는 이의 몫이 기쁨이라면
어둑한 그믐달에 비치는 희미한 그림자처럼
행복과 기쁨의 그늘이 어렴풋해도
슬픔이 불행만은 아니라는 믿음으로
행복과 기쁨이 부르는 손짓을 기다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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